도서/책가격비교 노란북
 
노란비디오
추천도서 베스트셀러 많이 본 책 신간도서 서점이벤트 재정가도서 통합가격비교
도올, 시진핑을 말한다
9788982641305
16,200원
파라오의비밀무덤
9788986019254
5,220원
화덕의 귀환
9788971398203
29,700원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9788933870693
19,800원
로마인 이야기
9788935610242
9,900원
조선의 퀴어
9788965642152
14,400원
가야문명사
9788963473833
49,500원
9788959665150 1,714
한국 음악의 거장들 - 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 : 한국 음악 명인열전
국내도서 >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한국 음악의 거장들 - 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 : 한국 음악 명인열전

송지원 지음
2012년 07월 31일 출간 정가 28,000원 페이지 404 Page

머리말 묵어서 아름다운 이야기, 옛 음악인에게 말 걸기

제1장. 거문고와 가야금의 거장
손끝의 음악이 아닌 마음의 음악을 하라 - 거문고 연주로 도(道)를 찾은 문인 오희상
뛰어난 연주는 사람의 혼조차 멈추게 한다 - 성현의 거문고 스승 이마지
선율에 녹아든 세월의 깊이 - 아름다운 거문고 연주자 상림춘
심금을 울리는 거문고의 음률 - 이금사의 거문고 소리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 졸옹의 가야금
탄금대에 울려 퍼진 가야금 소리 - 우륵과 가야금
가야금을 배우려거든 장가 먼저 들거라 - 가야금 연주자 민득량
소중한 것은 내밀히 보존되어야 한다 - 한겨울의 추위도 이겨 낸 음악가 김성기
늘그막에 비로소 짝이 있는 즐거움을 알았노라 - 금사 이원영
거문고 소리는 자신을 제어하게 한다 - 이승무와 거문고
문짝으로 만든 거문고 - 김일손의 탁영금

제2장. 시대를 울린 음악의 명인
대금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 - 장악원 악공 허억봉
북벌을 믿은 명나라 궁녀의 애절한 비파 - 소현세자를 따라온 명 유민 굴저와 비파
옷을 백 번이나 꿰매 입은 가난한 학자 - 가난한 신라 음악가 백결
대금 소리로 단풍을 더 붉게 물들이다 - 대금 부는 사나이 억량
현악기 소리가 관악기 소리 같네 - 아쟁의 거벽 김운란
현악기도 아닌 것이 관악기도 아닌 것이 - 유우춘과 해금
재능이란 것이 숨긴다고 숨겨지겠는가 - 숨어 사는 음악가 장천용
나를 찾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리다 - 송경운과 비파
나막신에 풀이 솟아오르다 - 정약대와 대금
꾸준한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 - 대금의 신선 김계선

제3장. 노래에 취한 가객
학을 춤추게 한 18세기 가객 - 음악 천재 김중열
이상의 길로 현실을 끌어 올리다 - 여성 음악가 석개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 - 여성 음악가 계섬
그 어떤 폭풍우도 흐트러뜨리지 못하는 소리 - 서울 가객 송실솔
노래가 좋아 가족도 버리다 - 유학자 집안의 노래 명인 유송년
시인과 가객의 면모를 두루 갖추다 - 꽃을 사랑한 가객 김수장
가법이 드디어 체제를 갖추다 - 가객 장우벽
외모 뒤에 숨겨진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 - 오디오형 가수 남학

제4장. 장악원의 음악 관리
시처럼 바람처럼 - 중종 대의 장악원 주부 정렴
음률을 알고 운치를 즐길 줄 아는 선비 - 정조 대의 장악원 제조 김용겸
음악성 있는 귀에는 듣지 않으려 해도 음악이 들린다 - 장악원 주부 허의
지천명에 찾은 새로운 음악 인생 - 장악원 직장 임흥
음악은 악보 속에서 영원히 빛난다 - 숙종 대의 궁중 음악 감독 한립
아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다 - 영조 대의 장악원정 이연덕

제5장. 이론가와 작곡가
발해의 음악이 일본의 궁중 음악이 되다 - 고구려 유민의 후손, 발해 음악가 고내웅(高內雄)
왕궁 안에 있는 신선이로다 - 고려시대 시조 작가 곽여
옛정을 생각하여 사랑해 주소서 - 「정과정곡」의 작자 정서
음악극을 기획한 자하동의 신선 - 고려시대 작곡가 채홍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인지 사람이 아름다운 것인지 - 「관동별곡」의 저자, 안축(安軸)
백성과 더불어 즐기노라 -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음악으로 담아낸 세종
시간은 좋은 음악을 고전으로 혹은 명품으로 만든다 - 「귀거래사」의 작곡가 강장손
홀로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다 - ≪악학궤범≫의 저자 성현
어찌 내 거문고 소리를 귀로 들으랴 - ≪현금동문류기≫의 저자 이득윤
음악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 음악 이론가 정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왕 - 절대 음감의 소유자 세조

제6장. 후원자와 감식가
800년간 전해진 역사 깊은 거문고 - 허목이 소장한 신라 경순왕의 거문고
음악 문화의 토양을 풍성하게 가꾸다 - 연암 박지원의 음악 사랑
줄 풍류 음악이 빚어낸 천상의 음률 - 양금을 우리나라 음조로 풀어 낸 담헌 홍대용
음악은 즐기는 것이다 - 성대중이 묘사한 18세기 음지의 음악 유희
풍악은 하늘을 울리고 노랫소리는 구름에 닿았다 - 심용과 그의 연주단
악기를 배우려면 좋은 선생에게 제대로 배워야 한다 - 조선 후기 음악 후원자 서상수

출처 : 알라딘 
저:송지원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사상사와 음악문화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악의 대중화에 관심이 커서 KBS와 국악방송에서 국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조선 시대 국가전례와 음악사상사, 음악문화사, 음악사회사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정조의 음악정책》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 ― 옛 음악인 이야기》와 공저로 《종묘제례악》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한국의 예술지원사》 등, 공역으로 《다산의 경학세계》와 《시경강의역주》(1~5) 등이 있다.

출처 : 예스24 
“온 마음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국의 전통 음악이 아름다운 건 우리 음악이라서가 아니다. 우리 음악은 기교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게 정돈되었을 때 연주해야 하는 음악, 즉 바로 마음으로 연주해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KBS와 국악방송에서 우리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송지원 교수가 소개하는 우리 음악의 거장 52인. 그들에게서 진정한 음악인의 자세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들어보자.

우리 전통 음악을 기록한 우리식 악보가 존재한다? 늘 서양식 악보만 접한 탓에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당신들의 음악을 ≪현학금보(玄鶴琴譜)≫(p20),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p31), ≪졸장만록(拙庄漫錄)≫(p41) 등에 기록하여 대를 이어 연주하였다. 이런 악보들의 존재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국악 사랑을 논한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 독서와 음주, 토론이 삶의 낙이었을 듯한 선비들이 오불탄(五不彈)과 오능(五能)이라는 엄격한 조건하에 거문고를 탄주하며 정신세계를 가다듬었다는 사실을 접하니, 학문과 음악을 이분법적으로 여긴 것이 우리 시대의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거문고를 대하는 선비의 자세, 오불탄과 오능
판중추부사 겸 태학사 오재순의 아들이자, 촉망받는 학자 오윤상의 동생인 오의상(1763~1833)은 벼슬을 거부하고 ‘삶의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였다.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여 병까지 났던 그는 당대의 선비들이 그러했듯 거문고를 탄주하며 잡생각을 지우곤 했는데, 그 실력도 뛰어나 명인으로 도 알려졌다. 오의상은 오불탄이라 하여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았고, 오능이라 하여 다섯 가지 자세를 갖추고 연주에 임했다고 하니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p17).

첫째,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심하게 내릴 때는 연주하지 않는다.
둘째, 속된 사람을 대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셋째, 저잣거리에서 연주하지 않는다.
넷째, 앉은 자세가 적당치 못할 때 연주하지 않는다.
다섯째,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 연주하지 않는다.
_ 오불탄(五不彈)

첫째, 앉는 자세를 안정감 있게 한다.
둘째, 시선은 한곳을 향하도록 한다.
셋째, 생각은 한가롭게 한다.
넷째, 정신은 맑게 유지하도록 한다.
다섯째, 지법(指法)은 견고히 하도록 한다.
_ 오능(五能)

모든 선비가 지켜야 했던 이러한 오불탄과 오능은 거문고가 정신세계를 다듬는 데 쓰이는 ‘악기 이상의 악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철저히 지킨 오의상의 연주는 청자의 마음을 훤히 트이게 하면서 정신을 맑게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선생은 거문고로 연주하지 않고 마음으로 연주하며, 소리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맞추시는 분이다”라고 평하기까지 했다.
오의상은 자신의 이런 음악 철학을 세상에 알리고 대대로 전하기 위해 ≪현학금보≫를 만들어 기술적으로 선율을 구분하여 연주하는 기교적인 ‘손가락 끝의 음악’보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화려한 무대 설비와 특수한 소도구에 의한 연출, 요란한 춤사위, 가수나 연주자의 외모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음악인들이 새겨들을 명언이다.

조선시대에도 가수의 ‘외모’가 중시되었음의 증거, 남학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가수가 가창력보다 외모로 평가되는 세태를 꼬집는다(p210). 그러나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가창력보다 외모로 가수를 평가했는데, 그 주된 예가 이옥(1760~1812)의 문집에 나오는 가수 남학(南鶴)이다.
이옥의 글에 따르면 남학은 최악의 외모를 타고난 가수였다. 난쟁이의 몸, 사자의 코, 늙은 양의 수염, 미친개의 눈, 닭발 같은 손을 지닌 덕에 남학이 모습을 보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놀라 울며 넘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이었다면 오디오형 가수가 되었을 듯”(p211)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바, 그의 노래는 화창한 날에 꾀꼬리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아름다웠고, 처마 끝에 달린 유리로 된 풍경이 울리는 소리처럼 영롱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 목소리를 잘 낸 덕에 친구의 부탁으로 여장을 하고 어두운 기생방에 들어앉아 노래를 부르니, 그 목소리만 듣고 기생들이 친자매처럼 다정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남학의 얼굴을 본 뒤에는 모두 비명을 지르거나 그 자리에 서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남학에게서 전해 듣고 많은 이가 웃었다지만, 당사자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우리는 가끔 목소리만 듣고 상대의 외모를 상상할 때가 있다. 목소리와 상상한 외모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간혹 실망하기도 한다. 외국 영화를 더빙할 때 아름다운 여주인공, 잘생긴 남주인공은 으레 멋진 목소리를 내는 성우의 몫이 된다. 사실은 그것도 이상하긴 하다. 얼굴이 잘생겨도 목소리는 좋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의 선입관은 어김없이 좋은 목소리는 잘생긴 외모와 일치시킨다. 그런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조선 후기 남학이라는 가수의 외모를 보고 누가 그런 고운 목소리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남학이 끝내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얼굴 없는 가수’로만 남아 있었다면 이옥의 글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그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졌을까? _p.215

만파식적의 재료가 된 명품 대나무, 쌍골죽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신라 신문왕 대(?~692) 감은사 근처 동해의 작은 섬에 대나무가 있었다. 그 대나무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된다는 보고를 받은 왕이 일관(日官)에게 그 일에 대해 묻자,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넋과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를 안정시킨 김유신 장군의 넋이 깃든 것”이라면서, 그것으로 저(笛)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하리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라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이 괴이한 설화는 “진골계 왕의 권위를 확립하려고 만들어냈을 이야기”이며, 오늘날 대금으로 불리는 악기의 조상인 만파식적의 원료 쌍골죽(雙骨竹)을 소개한다.
살이 두꺼워서 악기의 내경(內徑)을 고르게 만들 수 있고, 나무가 단단해서 잘 터지지도 않으며 소리도 야무진 쌍골죽은 일종의 병죽(病竹)으로 대나무의 외경 양쪽에 골이 패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려 2만 그루의 대나무 중에서 한 그루 나올까 말까하며 3년 이상 된 것을 최고로 치기에 쌍골죽을 채취하는 이들은 심마니들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대숲에 들어간다고 한다. 채취한 뒤에도 불을 골고루 쬐어 진을 빼고 석 달 동안 음지에서 말린 뒤, 소금물에 한 달 동안 담갔다가 건조하는데(p147),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던 장인들의 정성이 떠오른다. 그 뒤 밀초 작업과 청 작업을 거쳐 완성되는 대금은 자연의 원성(元聲)을 담고 있으니, 유유자적함을 즐기고 넉넉한 정신세계와 만백성을 위한 태평성대를 추구했던 진정한 선비들이 사랑했을 만하다.

조선총독부도 알아서 모신 대금의 신선, 김계선
“대금처럼 만인(萬人)을 즐겁게 하는 악기는 속이 비어 있소!”라는 명언으로 자신의 궁핍함을 달게 받아들인 예술가가 있었다. 실학자 지봉 이수광의 5대손 이덕주(1695~1751)가 「민득량전(閔得亮傳)」으로 소개한 가야금의 달인 민득량에게 스승이 처음 해준 말도 “가야금을 배우려면 장가부터 들라”(p52)였을 정도로 예술가의 삶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던 경성 방송국마저 그를 위한 고정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니 그 실력은 물론 삶도 궁금하다.
구한말에 태어나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김계선(1891~1943)은 부친 친구의 권유로 당시 내영(內營)의 취악대인 겸내취(兼內吹)가 되면서 악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마침 고종 대의 대금 명인 최학봉의 문하에 들 수 있었던 그는 끊임없는 연습으로 스승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면서 조선 왕실의 아악부에서 주목을 받았다. 경성 방송국에서도 초빙을 받아 그의 대금 연주가 라디오 전파를 타기에 이르렀다. 대금은 물론 당적, 단소, 심지어 서양 악기인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색소폰 등 ‘속이 빈 악기’에는 모두 능했다. “대금의 신선이다!”, “김계선 이전에 김계선 없고, 김계선 이후에 김계선 없다”(p154) 같은 극찬에도 김계선은 “남의 곱절, 아니 수십 배 더 많이 불었을 뿐입니다”라며 겸손했다. 그는 일제시대의 대스타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도 있었지만, 굶주려 죽은 뒤 화장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졌을 정도로 임종과 장례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 “비어 있는 것의 미덕을 평생 간직하려고 했던”(p155) 그의 참뜻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조국의 부활을 꿈꾼 비파의 명인, 굴저
병자호란 뒤 청나라로 압송된 소현세자(1612~1645)는 9년간의 인질 생활 후 명나라 환관 다섯 명과 궁녀 네 명을 데리고 환국했다. 그중 굴저(屈姐)로 알려진 궁녀는 비파 실력이 뛰어나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던 장악원에 머물며 조선인 제자들을 양성하거나 소현세자의 아우인 효종에게 명나라식 머리 매는 법 등을 자문했다. 그 시절 조선은 전란의 후유증으로 악기 연주자들과 무희들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왕실 제례악 체계마저 무너진 터라 굴저의 공은 결코 적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숙종은 명나라 병부상서 전응양의 손자이며 명나라로부터의 망명객이자 당시 강원도 월송만호였던 전회일에게 굴저의 제사를 맡도록 조치했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 2동 간촌 마을에 있는 그녀의 묘는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p102).
일곱 살 때 명나라 숭정제의 황후를 모시면서 궁녀의 삶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자성의 난으로 자금성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하자 민간으로 도피했다가 청나라의 예친왕 도르곤에게 이자성이 패한 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자신을 부랑배라고 부르며 항거하는 굴저의 미모에 반한 도르곤은 그녀의 처우를 고민하다가 소현세자에게 인계했고, 소현세자의 귀국 후 인조의 계비 장렬왕비의 시중을 들다가 장악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효종의 북벌 계획을 듣자 명나라가 부활하리라 믿었고, 숙종 대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도 “내가 죽으면 북벌하러 가는 조선군을 볼 수 있게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물론 굴저가 원했던 북벌도, 명나라의 부활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쓰던 자단목(紫檀木) 비파마저 그 가치와 쓰임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우물 관리용 도구로 쓰였다고 한다. 다행히 조선 후기 대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강세황의 자손 강이오에 의해 발견되고 수리된 이 비파는 연주될 때마다 “그 소리에 애절함이 담겨 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p100).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져온 망국의 악기, 가야금
아전투구의 나날을 보내는 가야를 멸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 진흥왕(534~576) 앞에 가야국 악사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나타났다. 우륵은 저마다 자기 생각만 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는 가야국은 더 이상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면서 가야금의 도(道)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망명했다는 뜻을 밝혔고, 이에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서 지내게 했다. 우륵은 계고, 법지, 만덕이라는 총명한 자들을 뽑아 가야금 연주와 노래, 춤을 가르쳤고(p45), 세 사람은 우륵이 지은 열한 곡까지 전수를 받았다. 허나 스승의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니 아정하다고 할 수 없다(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고 판단한 제자들은 스승께 보고하지도 않고 곡을 다섯 개로 줄여버렸고, 이에 노발대발한 스승 앞에서 그 다섯 곡을 연주하니 스승은 찬탄하기를 “즐거우나 지나치지 않고, 슬프나 비탄에 젖게 하지는 않으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고 했다. 이 찬탄은 지금도 정악(正樂)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진흥왕 앞에서 처음 연주했을 때, 신하들은 “가야국의 음악은 망국(亡國)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주장했고, 이에 진흥왕은 “가야 왕이 음란해서 자멸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하며 우륵의 음악을 신라의 대악(大樂)이 되게 함으로써 가야의 음악이 신라 땅에서 명맥을 잇게 했다(p47). 가야는 멸망했어도 가야의 음악은 살아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야금은 가야의 음악과 함께 살아남아 신라의 삼국 통일 후에는 삼현삼죽(三絃三竹) 악기 중 하나로 대접받았으며,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거문고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신라 가야금은 서기 5~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학자에 따라선 신라 미추왕(?~284) 때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p47). 신라산 가야금의 실물은 일본의 왕실 유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보존되어 있으며(p47), 현지에서 ‘시라기고토(新羅琴)’라고 불린다. 이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악기가 우리나라 국립국악원의 국악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망해가는 조국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지탄을 받았을 우륵이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은 아주 귀중한 문화적 재산을 상실하지 않았겠는가.

건륭 임진년 6월 18일 유시, 국악과 양악의 만남
종종 뉴스에서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국악기로 재즈를 연주하거나, 양악기로 국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보여준다. 이는 대중뿐만 아니라 매체마저 국악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분위기를 일신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럼 과연 누가 최초로 이러한 시도를 했을까? 뜻밖에도 그 시도는 무려 240년 전에 처음 이루어졌으며, 그 일을 한 사람과 그 사건을 기록한 사람 모두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 전자는 담헌 홍대용(1731~1783)이고, 후자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양금을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금이라 부르며, 서양인들은 천금이라 하고, 중국인들은 이를 번금 또는 천금이라 부른다. 이 악기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우리나라 음악의 조에 맞추어 풀어내기는 홍대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건륭 임진년(1772) 6월 18일로서 내가 홍대용의 집에 가 앉아 있을 때의 일인데, 유시(오후 5~7시)쯤에 홍대용이 이 악기를 해득하였다. 홍대용은 음악을 감식함에 꽤 예민했고, 비록 이것이 작은 기예에 불과하긴 하나, 처음 비롯되는 일이므로 내가 그 일시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이 악기는 그 뒤로 널리 퍼져 지금까지 9년 사이에 제 금사들이 이 철현금을 타지 못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_ ≪열하일기≫ 중 <동란섭필(銅蘭涉筆)>에서 _p.360

여섯 살 차이의 두 사람은 함께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할 정도로 뜻이 맞았기에,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홍대용이 세상을 뜨자 박지원은 “악기를 볼 때마다 담헌이 떠오른다”며 집에 있던 악기를 모두 처분한 뒤 8년간 음악을 멀리했다고 한다(p363). 이렇듯 박지원에게 상당한 학문적 자극을 준 홍대용은 1765년에 숙부인 홍억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현지 지식인들과 교류한 뒤 기행문인 ≪담헌연기(湛軒燕記)≫를 집필했으며, 청나라 사람들이 서양 악기인 덜시머(dulcimer)와 쳄발로(cembalo)를 모방해 제작한 양금(洋琴)을 수입하여 소개했다. 그러나 연주하는 방법을 배워오지 못한 홍대용은 수년의 노력 끝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금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고, 새로운 소리를 갈망하던 18세기의 조선인들은 이를 수용하여 국악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각기 다른 여러 문화의 만남이 충돌 대신 융합을 이루면서 풍요로움을 창출한 아주 멋진 사례인 셈이다.

한국의 괴짜 음악인들
≪아마데우스≫에서는 점잖은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괴짜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이 책에도 우리나라의 모차르트 못지않은 괴짜 음악인들이 소개되어 있다. 세조(1417~1468)는 자기보다 소(嘯, 일종의 휘파람)를 더 잘 부는 소리가 들려오자 “저건 귀신의 소리다!”라고 단정했으며, 신하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퉁소의 달인인 장천용은 부친상을 당한 동료가 짚은 지팡이를 보고 “저것은 좋은 대나무다!”라면서 훔쳐다가 퉁소를 만들었다. 그를 두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재능을 숨기고 사는 기인(奇人)”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거문고의 달인이라고 으스대던 왕족 앞에서 우스개 노래들을 연달아 지어내 기를 죽인 송실솔의 이야기까지 읽다보면 이들의 이야기가 모차르트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이고 재미있다.
물론 이런 우스운 이야기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성균관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시력을 상실한 뒤 피나는 노력으로 아쟁을 배워 귀신마저 울린 김운란, 손가락질까지 받을 정도로 못난 외모를 가졌지만 노래에 대한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은 석개, 아전의 딸이었으나 고아가 되어 노비 신분으로 추락한 뒤에도 예조판서 이정보와 심용의 후원을 받아내 꿈을 이룬 계섬, 그리고 설날 음식을 마련할 수 없어 눈물짓는 아내를 위해 가야금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묘사한 백결 선생 등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중의 기호에 철저히 영합한 작품과 순수 예술 작품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늘날 예술인의 처지마저 떠올리게 하니, ≪한국 음악의 거장들≫은 한국 음악사와 문화사를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출처 : 알라딘 
9788959665150
25,200원
노란북 링크 공유사이트 : *자기경영노하우(카페)
노란북 개인정보취급방침 광고/제휴문의  세종특별자치시 가름로 255-21(2차푸르지오시티) 1452호
사업자번호 203-02-92535 인종일 신고번호 제 2015-세종-0075호 E-mail dlsjong@naver.com 010-2865-2225
COPYRIGHT(c) noranbook.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