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와 서구 - 에덴에서 제국으로

서구적 정체성 형성의 중심적 방법론이 된
열대에 관한 지리적 사유!

‘열대’의 발명, 그 속에 감춰진 욕망
열대는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3.27도와 남위 23.27도 사이의 지리적 공간”을 가리키거나 기후대 중 하나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근대 서구에게 열대란 지리적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토 개념이다. 우리는 ‘실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열대가 어떻게 타자에 의해 발명될 수 있었는가?’의 물음에서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상하게 둔갑하여 열대에 작동한 서구 욕망의 한 자락을 읽어낼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와 열대의 접속은 일방적이었다. 서구의 욕망이 열대라는 공간에 깊이 개입되자, 열대는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열대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의 영토로 변모해갔다. 마치 화가의 캔버스나 과학자의 실험실처럼 열대는 누군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제공처로 전락했고, 오히려 서구를 위해 다시금 ‘발명’되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구는 열대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립해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서구가 “열대를 발명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 지리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했으며, ‘열대’라는 무성한 숲에서 서구적 정체성이 어떻게 태동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열대’발명의 4가지 스펙트럼 - 풍토, 자연, 예술, 환경위생
이 책은 “열대는 풍토적 개념이다”(1장)라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풍토’에서 열대를 보는 서구의 차별적인 시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열대는 이미 서구 개입 이전에도 ‘타자화’된 채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서구 제국주의가 열대를 바라본 이분법적인 시각이 오히려 열대의 타자화를 촉진시킨 게 문제였다. 그들은 “서구 : 열대 = 깨끗함 : 불결함 = 문명 : 야만” 식으로 도식화하여 열대를 규정한 뒤 그들의 방법으로 열대를 발명해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떻게 열대가 서구에 의해 물리적 공간에서 “개념적 ? 도덕적 공간”으로 탈바꿈해가는지 4가지 스펙트럼 ― 풍토, 자연, 예술, 환경위생 ― 을 통해 조명하고 있으며, 거기에 “열대학의 사상적 토대로 바슐라르, 캉길렘, 푸코, 니체의 과학사 및 철학”을 접목시켜 열대와 서구 정체성의 불편한(?) 친연 관계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열대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풍토의 개념에 위치시키고, 미지의 땅이었던 오리엔트에 대한 상상력이 열대와 맞물려 어떻게 서구 정체성으로 발전해나갔는지 역사의 얼개 속에서 각 분야별로 살펴보고 있다. 서구가 열대의 자연, 특히 식물지리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어떻게 열대 자연을 발견하였는가(2장)와 유럽 낭만주의 인식이 열대에 어떻게 투영되어 문학과 미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는지(3장), 그리고 열대질병을 정복함으로써 과학적 연구 발달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세계를 지정학적으로 구분하는 준거가 된 점(4장) 등 열대 발명의 영역을 입체적으로 펼쳐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지리학, 역사학, 박물학, 식물학, 의학, 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열대와 서구적 정체성’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합 ? 재구성하여 그동안 생소했던 ‘열대’에 관한 연구를 표면 위로 부상시킨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건상 자료 확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동안 틈틈이 모은 관련 통계 자료 및 지도, 다양한 도판 등의 시각 자료 등을 함께 실어 그 시대의 열대에 대한 서구 열강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열대’공간의 다양한 변주 형식들
물리적인 삶의 자리가 열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의 현실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와 많이 비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지적대로, 그동안 한국은 열대학의 불모지였고, 따라서 열대학에 관한 연구와 자료가 전무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지구화의 추세에서 볼 때 이 책은 이런 지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열대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연구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게끔 해준다. 우리가 열대를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적도 인근 어느 지방의 풍토, 문화사, 혹은 그것과 관계된 열강들의 역사만을 보고자 함은 아니다. ‘열대와 서구’에서 ‘열대’와 ‘서구’라는 말 대신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언어로 바꿔 각각 대입시켜본다면 ‘열대’라는 말은 오늘날 무수히 확장이 가능한 공간이 된다. 지금 세계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더욱 ‘타자화’하는가? 문명 계발 및 자립이라는 명목하에 활발히 펼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대외 활동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양화 사회에서 ‘타자’의 의미가 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그 안에 감춰진 다른 방식의 욕망을 놓치기 쉽다. 서구가 열대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할 때 ‘풍토’의 개념 속에서 자리 잡고 있던 타자에 대한 ‘차별’의 시각이 현재 우리에게도 엄연히 존재한다. 한때 ‘에덴’이기도 했지만 서구에 의해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린 열대, 어쩌면 세계는 지금 각국의 욕망이 분출되어 다른 의미의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